연주회에 가는 묘미 중 하나가 본 연주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 등장할 수도 있는 앙코르에 있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와 <라데츠키 행진곡>처럼, 예상가능한 앙코르를 듣는 즐거움도 크지만 어떤 작품이 연주될지 예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감상하게 되는 앙코르 무대의 특별함은 참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보통 1~2작품 정도를 연주하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인 앙코르 무대에서 어떤 연주자들은 더 많은 작품들을 연주하며 꽤 긴 시간동안 청중들을 열광시키기도 하지요. 얼마나 많은 앙코르를 연주할지 항상 궁금하게 하는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E. Kissin)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앙코르(Encore)라는 단어는 ‘여전히, 아직, 다시’ 등 여러 뜻을 지닌 프랑스어입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에서는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앵콜’이라는 단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사실 앵콜은 앙코르가 잘못 발음된 것에 불과합니다. 앙코르에 대한 흥미로운 칼럼을 썼던 제레미 니콜라스(J. Nicholas)와 제임스 베넷(J. Bennett II)의 글들을 비롯한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면 앙코르 관습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앙코르에 대한 언급은 18세기 초의 자료에서도 나올만큼, 앙코르 관습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당시의 앙코르는 프로그램에 있던 작품 혹은 작품의 일부를 ‘반복’한다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본 프로그램과는 다른 작품이 연주되곤 하는 오늘날의 관습과는 차이가 있지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앙코르를 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오늘날 앙코르는 본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뒤에 연주하게 되는데 18세기, 그리고 적어도 19세기 전반에는 청중이 박수를 열렬히 보내면 연주자들이 본 프로그램 중간에도 앙코르를 연주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는 악장 사이, 심지어는 작품이 한창 연주되고 있는 와중에도 박수를 치곤 했던 당시의 관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베토벤(L. v. Beethoven)의 교향곡 7번의 초연 무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청중들은 특히 2악장을 좋아했는데 초연 당시 2악장은 전곡이 모두 끝난 후가 아닌, 2악장이 끝난 후 열광적이었던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 다시 한 번 연주되었지요. 이렇듯 작품의 진행 중간에도 그 일부가 반복된다는 것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언뜻 생각하면 마냥 좋을 것만 같기도 하지만 중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작품의 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작품 진행의 흐름이 끊길 위험이 높았던 것이었지요. 하이든(F. J. Haydn)이 그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의 초연 당시, 청중들에게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작품의 연속성이 방해받지 않도록 앙코르를 요청하지 않는 것으로 그 마음을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 걱정했던 작곡가의 마음을 잘 나타냅니다. 늘 풍성한 앙코르 무대로 화제를 모으는 피아니스트 키신(출처: www.klavierfestival.de) 오늘날의 앙코르 관습이 언제 정착되었는지 그 시점을 정확히 알기란 어렵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콘서트홀과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 관습이 원래는 서로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입니다. 콘서트홀에서는 작품의 진행 중간에 나오는 박수가 점차 사라졌고 앙코르는 본 프로그램 이후에 새로운 작품들로 연주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여전히 작품의 진행 중간에 예를 들면 아리아가 끝난 후 박수가 나옵니다. 간혹,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는 앙코르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게 발생하지요. 그리고, 드물게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앙코르는 새로운 작품이 아닌, 방금 불리웠던 아리아 혹은 합창의 ‘반복’입니다. 즉,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반복의 의미가 강했던 옛 앙코르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사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방금 끝난 아리아의 반복을 넘어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와는 상관없는 아리아가 공연 중간에 앙코르로 불리워질 정도로 자유분방한 면이 다분했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관습이었겠지만,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토스카니니(A. Toscanini)와 같이 이를 끔찍하게 여겼던 지휘자와 오페라 하우스 측에 의해 점차 사라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온 앙코르 관습. 앞으로도 변화가 이어지겠지만 연주회를 더욱 기억에 남게 하는 앙코르의 매력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앙코르의 옛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일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1963년 9월, 뉴욕에서는 에릭 사티(E. Satie)의 <벡사시옹(Vexation)>이라는 작품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제목은 짜증, 괴롭힘, 학대 등으로 번역되지요. 작품은 단 한 페이지의 악보로 되어있는데 문제는 이를 840번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초연 당시 12명의 피아니스트가 교대로 연주했는데 연주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낮 12시 40분까지, 총 18시간 4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는데 성공한 청중은 단 한 명이었지요. 이를 취재했던 뉴욕 타임즈의 평론가는 새벽 4시경 잠이 들었으며 결국 마지막에 남아있던 청중은 6명에 불과했습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연주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남아있던 청중 한 명이 외쳤습니다. “ENCORE!” 추천영상: 다니엘 바렌보임과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2017년에 열었던 https://www.youtube.com/watch?v=nuXr_tQXYPw |
연주회에 가는 묘미 중 하나가 본 연주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 등장할 수도 있는 앙코르에 있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와 <라데츠키 행진곡>처럼, 예상가능한 앙코르를 듣는 즐거움도 크지만 어떤 작품이 연주될지 예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감상하게 되는 앙코르 무대의 특별함은 참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보통 1~2작품 정도를 연주하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인 앙코르 무대에서 어떤 연주자들은 더 많은 작품들을 연주하며 꽤 긴 시간동안 청중들을 열광시키기도 하지요. 얼마나 많은 앙코르를 연주할지 항상 궁금하게 하는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E. Kissin)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앙코르(Encore)라는 단어는 ‘여전히, 아직, 다시’ 등 여러 뜻을 지닌 프랑스어입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에서는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앵콜’이라는 단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사실 앵콜은 앙코르가 잘못 발음된 것에 불과합니다.
앙코르에 대한 흥미로운 칼럼을 썼던 제레미 니콜라스(J. Nicholas)와 제임스 베넷(J. Bennett II)의 글들을 비롯한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면 앙코르 관습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앙코르에 대한 언급은 18세기 초의 자료에서도 나올만큼, 앙코르 관습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당시의 앙코르는 프로그램에 있던 작품 혹은 작품의 일부를 ‘반복’한다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본 프로그램과는 다른 작품이 연주되곤 하는 오늘날의 관습과는 차이가 있지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앙코르를 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오늘날 앙코르는 본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뒤에 연주하게 되는데 18세기, 그리고 적어도 19세기 전반에는 청중이 박수를 열렬히 보내면 연주자들이 본 프로그램 중간에도 앙코르를 연주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는 악장 사이, 심지어는 작품이 한창 연주되고 있는 와중에도 박수를 치곤 했던 당시의 관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베토벤(L. v. Beethoven)의 교향곡 7번의 초연 무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청중들은 특히 2악장을 좋아했는데 초연 당시 2악장은 전곡이 모두 끝난 후가 아닌, 2악장이 끝난 후 열광적이었던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 다시 한 번 연주되었지요.
이렇듯 작품의 진행 중간에도 그 일부가 반복된다는 것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언뜻 생각하면 마냥 좋을 것만 같기도 하지만 중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작품의 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작품 진행의 흐름이 끊길 위험이 높았던 것이었지요. 하이든(F. J. Haydn)이 그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의 초연 당시, 청중들에게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작품의 연속성이 방해받지 않도록 앙코르를 요청하지 않는 것으로 그 마음을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 걱정했던 작곡가의 마음을 잘 나타냅니다.
늘 풍성한 앙코르 무대로 화제를 모으는 피아니스트 키신(출처: www.klavierfestival.de)
오늘날의 앙코르 관습이 언제 정착되었는지 그 시점을 정확히 알기란 어렵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콘서트홀과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 관습이 원래는 서로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입니다. 콘서트홀에서는 작품의 진행 중간에 나오는 박수가 점차 사라졌고 앙코르는 본 프로그램 이후에 새로운 작품들로 연주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여전히 작품의 진행 중간에 예를 들면 아리아가 끝난 후 박수가 나옵니다. 간혹,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는 앙코르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게 발생하지요. 그리고, 드물게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앙코르는 새로운 작품이 아닌, 방금 불리웠던 아리아 혹은 합창의 ‘반복’입니다. 즉,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반복의 의미가 강했던 옛 앙코르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사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방금 끝난 아리아의 반복을 넘어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와는 상관없는 아리아가 공연 중간에 앙코르로 불리워질 정도로 자유분방한 면이 다분했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관습이었겠지만,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토스카니니(A. Toscanini)와 같이 이를 끔찍하게 여겼던 지휘자와 오페라 하우스 측에 의해 점차 사라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온 앙코르 관습. 앞으로도 변화가 이어지겠지만 연주회를 더욱 기억에 남게 하는 앙코르의 매력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앙코르의 옛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일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1963년 9월, 뉴욕에서는 에릭 사티(E. Satie)의 <벡사시옹(Vexation)>이라는 작품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제목은 짜증, 괴롭힘, 학대 등으로 번역되지요. 작품은 단 한 페이지의 악보로 되어있는데 문제는 이를 840번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초연 당시 12명의 피아니스트가 교대로 연주했는데 연주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낮 12시 40분까지, 총 18시간 4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는데 성공한 청중은 단 한 명이었지요. 이를 취재했던 뉴욕 타임즈의 평론가는 새벽 4시경 잠이 들었으며 결국 마지막에 남아있던 청중은 6명에 불과했습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연주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남아있던 청중 한 명이 외쳤습니다.
“ENCORE!”
추천영상: 다니엘 바렌보임과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2017년에 열었던에서의 앙코르입니다. 이 음악회에서는 어린이들이 많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본 프로그램의 구성 자체가 어린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졌지요. 영상 첫 부분에 등장하는 바렌보임의 멘트에서도 이 음악회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요. 바렌보임과 아르헤리치는 앙코르 무대에서 어린이들을 무대 위로 초대하여 그들의 연주를 정말 코 앞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순간으로 남았을 이들의 앙코르. 천진난만한 어린이들과 이들에 둘러싸여 연주하는 바렌보임과 아르헤리치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uXr_tQXYPw
보통 1~2작품 정도를 연주하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인 앙코르 무대에서 어떤 연주자들은 더 많은 작품들을 연주하며 꽤 긴 시간동안 청중들을 열광시키기도 하지요. 얼마나 많은 앙코르를 연주할지 항상 궁금하게 하는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E. Kissin)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앙코르(Encore)라는 단어는 ‘여전히, 아직, 다시’ 등 여러 뜻을 지닌 프랑스어입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에서는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앵콜’이라는 단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사실 앵콜은 앙코르가 잘못 발음된 것에 불과합니다.
앙코르에 대한 흥미로운 칼럼을 썼던 제레미 니콜라스(J. Nicholas)와 제임스 베넷(J. Bennett II)의 글들을 비롯한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면 앙코르 관습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앙코르에 대한 언급은 18세기 초의 자료에서도 나올만큼, 앙코르 관습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당시의 앙코르는 프로그램에 있던 작품 혹은 작품의 일부를 ‘반복’한다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본 프로그램과는 다른 작품이 연주되곤 하는 오늘날의 관습과는 차이가 있지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앙코르를 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오늘날 앙코르는 본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뒤에 연주하게 되는데 18세기, 그리고 적어도 19세기 전반에는 청중이 박수를 열렬히 보내면 연주자들이 본 프로그램 중간에도 앙코르를 연주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는 악장 사이, 심지어는 작품이 한창 연주되고 있는 와중에도 박수를 치곤 했던 당시의 관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베토벤(L. v. Beethoven)의 교향곡 7번의 초연 무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청중들은 특히 2악장을 좋아했는데 초연 당시 2악장은 전곡이 모두 끝난 후가 아닌, 2악장이 끝난 후 열광적이었던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 다시 한 번 연주되었지요.
이렇듯 작품의 진행 중간에도 그 일부가 반복된다는 것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언뜻 생각하면 마냥 좋을 것만 같기도 하지만 중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작품의 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작품 진행의 흐름이 끊길 위험이 높았던 것이었지요. 하이든(F. J. Haydn)이 그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의 초연 당시, 청중들에게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작품의 연속성이 방해받지 않도록 앙코르를 요청하지 않는 것으로 그 마음을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 걱정했던 작곡가의 마음을 잘 나타냅니다.
늘 풍성한 앙코르 무대로 화제를 모으는 피아니스트 키신(출처: www.klavierfestival.de)
오늘날의 앙코르 관습이 언제 정착되었는지 그 시점을 정확히 알기란 어렵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콘서트홀과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 관습이 원래는 서로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입니다. 콘서트홀에서는 작품의 진행 중간에 나오는 박수가 점차 사라졌고 앙코르는 본 프로그램 이후에 새로운 작품들로 연주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여전히 작품의 진행 중간에 예를 들면 아리아가 끝난 후 박수가 나옵니다. 간혹,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는 앙코르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게 발생하지요. 그리고, 드물게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앙코르는 새로운 작품이 아닌, 방금 불리웠던 아리아 혹은 합창의 ‘반복’입니다. 즉,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반복의 의미가 강했던 옛 앙코르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사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방금 끝난 아리아의 반복을 넘어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와는 상관없는 아리아가 공연 중간에 앙코르로 불리워질 정도로 자유분방한 면이 다분했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관습이었겠지만,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코르는 토스카니니(A. Toscanini)와 같이 이를 끔찍하게 여겼던 지휘자와 오페라 하우스 측에 의해 점차 사라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온 앙코르 관습. 앞으로도 변화가 이어지겠지만 연주회를 더욱 기억에 남게 하는 앙코르의 매력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앙코르의 옛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일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1963년 9월, 뉴욕에서는 에릭 사티(E. Satie)의 <벡사시옹(Vexation)>이라는 작품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제목은 짜증, 괴롭힘, 학대 등으로 번역되지요. 작품은 단 한 페이지의 악보로 되어있는데 문제는 이를 840번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초연 당시 12명의 피아니스트가 교대로 연주했는데 연주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낮 12시 40분까지, 총 18시간 4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는데 성공한 청중은 단 한 명이었지요. 이를 취재했던 뉴욕 타임즈의 평론가는 새벽 4시경 잠이 들었으며 결국 마지막에 남아있던 청중은 6명에 불과했습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연주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남아있던 청중 한 명이 외쳤습니다.
“ENCORE!”
추천영상: 다니엘 바렌보임과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2017년에 열었던
https://www.youtube.com/watch?v=nuXr_tQXY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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