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리드리히 굴다의 '첼로 협주곡'을 담은 음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클래식 장르를 무색하게 만들며 스윙밴드 스타일의 재즈,록, 오스트리아 토속음악 등 여러 장르를 한껏 버무려놓은 이 작품이 요즘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느 성공한 클래식 피아니스트답지 않게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오갔던 당시 그의 파격 행보가 현대인의 정서와 문화에 어느 정도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는 1930년생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놀라운 신동이었다.16세의 어린 나이에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이듬해 세계적인 음반사 Decca와 계약했으며 20세가 되던 해 뉴욕 카네기홀 리싸이틀 무대에 오르며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말이다. 1950년대에 걸쳐 녹음한 건반악기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음반은 지금까지 최고의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뿐 아니라 건반악기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녹음에 대해 그라모폰지는 '퍼스트 클래스'라고 추켜세운 바 있다. 게다가 빈 필과 함께한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 이후 그에게는 모짜르트 스페셜리스트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다녔다. 보기드문 놀라운 성과였다. 하지만 클래식에서 젊은 거장으로 주목받던 그가 50년대부터 재즈에 심취하더니 점점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연미복을 벗어버리고 짙은 색안경에 히피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으며 클래식에 재즈, 전자음악을 입히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와 모짜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녹음한다거나 클래식 공연에서 재즈 즉흥 연주를 선보이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빈 음악 아카데미 회원들이 수여한 명예로운 상 '베토벤 링'을 자진 반납하면서 경직된 교육시스템을 비판하며 음악계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튀는 행동들은 '배드 보이', '테러리스트 피아니스트'와 같은 수식어를 그에게 안겨주었으며 언론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제공했다. 빈 필과 모짜르트 협주곡을 연주한 이후 자작곡인 'Concerto for Myself '를 연주했을때 오스트리아의 일간지 'Kurier'는 '모짜르트와 방귀'라는 원색적인 기사제목을 내놓기도 했다. 비엔나 출신이라는 프리미엄과 젊은 시절 잘 다져놓은 화려한 이력을 뒤로한 채 누구도 예상치못한 행보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마찬가지로 비엔나 출신으로 조성의 틀을 깨버린 쇤베르크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어간 형식과 문법에 치우친 현대음악에대한 반감이 작용했다. 그는 젊은 시절,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으며 언제나 음악의 본질을 강조했다. 독일 유력 주간지 '차이트(Zei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재즈를 연주하지 쇤베르크를 연주하지 않는다"며 "쇤베르크의 길을 걷고 싶지않기 때문에 조성 음악을 추구한다"고도 했다. 20세기말, 의식적으로 현대음악을 연주해야한다는 무브먼트에 맞서 청중과 호흡하는 음악을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이른 성공을 거뒀지만 보수적이며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빈 음악계에 대한 반발심 또한 그의 느닷없는 행보와 연관이 깊다.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받다보니 결점없는 연주에 대한 부담감이 을 터. 그는 마치 스포츠에서 기록을 매기는 것처럼 매번 연주때마다 틀리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힘들었다고 한다. " 클래식 무대에서는 만족감,평안,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덧붙임과 함께. 실제로 그의 바흐, 베토벤 음반들은 전통적인 조형미가 한껏 살아있는데 온전히 정통 클래식이란 틀 안에서 성장했기에 예술적 자유를 꿈꿔왔던 그는 무척이나 답답했을 것이다. 비엔나 아카데미 회원들이 수여한 베토벤 링을 반납했던 그의 치기어린 결기는 좋은 예이며 확고한 저항이었다. 1999년 본인의 가짜 부고소식을 언론사에 알리고 결국, 버젓이 살아있음을 기념하는 '부활 파티'를 여는가 하면 나체로 연주하는 극단적인 기행도 서슴치않았는데 이는 많은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비엔나 스타일의 음악과 재즈 블루스를 절묘하게 결합해낸 것을 비롯해 음악 장르간의 경계를 허문 성과나 가장 보수적인 비엔나 음악계 한복판에서 솔직담백한 입담과 행동으로 '예술적 자유'를 외쳤던 그의 용기는 박수 받을만 하다. 현재 그는 클래식을 비롯해서 다양한 자유롭게 오간 천재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예술세계는 참신함과 더불어 장르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융합된 예술이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현시대와 궤를 같이한다. 자기 자신을 '20세기 후반,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비엔나 출신 음악가'로 추켜 세우다보니 생전 호불호가 갈렸는데 개인주의적 성향과 소신 발언에 거침없는 이 시대의 젊은 세대에게는 어떤면에서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 아닐까. 그의 저서' Wort zur Musik'에서 그는 주장한다. "음악가의 과제는 관객에게 행복감을 주거나 최소한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괴짜,미치광이라는 수식어에 아랑곳하지않고 오롯이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철학을 견지했던 그가 이 시대에 인정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굴다 첼로 협주곡 op.129는 5악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1악장 '서곡(Overture)'을 들어보라. 빅밴드 스타일의 금관악기에 첼로의 경쾌한 리프와 록,펑크 스타일이 녹아있으며, 또한 이와 대조적으로 서정적인 오스트리아 민속 음악도 등장한다. 재즈나 펑크,록에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첼로가 돋보이면서도 다양한 음악장르가 녹아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며 듣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는 음악임에는 틀림없다. 유튜브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XgvUfJKEvPU&list=RDC1vtL63PWn8&index=2 |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리드리히 굴다의 '첼로 협주곡'을 담은 음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클래식 장르를 무색하게 만들며 스윙밴드 스타일의 재즈,록, 오스트리아 토속음악 등 여러 장르를 한껏 버무려놓은 이 작품이 요즘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느 성공한 클래식 피아니스트답지 않게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오갔던 당시 그의 파격 행보가 현대인의 정서와 문화에 어느 정도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는 1930년생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놀라운 신동이었다.16세의 어린 나이에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이듬해 세계적인 음반사 Decca와 계약했으며 20세가 되던 해 뉴욕 카네기홀 리싸이틀 무대에 오르며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말이다.
1950년대에 걸쳐 녹음한 건반악기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음반은 지금까지 최고의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뿐 아니라 건반악기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녹음에 대해 그라모폰지는 '퍼스트 클래스'라고 추켜세운 바 있다. 게다가 빈 필과 함께한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 이후 그에게는 모짜르트 스페셜리스트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다녔다. 보기드문 놀라운 성과였다.
하지만 클래식에서 젊은 거장으로 주목받던 그가 50년대부터 재즈에 심취하더니 점점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연미복을 벗어버리고 짙은 색안경에 히피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으며 클래식에 재즈, 전자음악을 입히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와 모짜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녹음한다거나 클래식 공연에서 재즈 즉흥 연주를 선보이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빈 음악 아카데미 회원들이 수여한 명예로운 상 '베토벤 링'을 자진 반납하면서 경직된 교육시스템을 비판하며 음악계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튀는 행동들은 '배드 보이', '테러리스트 피아니스트'와 같은 수식어를 그에게 안겨주었으며 언론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제공했다. 빈 필과 모짜르트 협주곡을 연주한 이후 자작곡인 'Concerto for Myself '를 연주했을때 오스트리아의 일간지 'Kurier'는 '모짜르트와 방귀'라는 원색적인 기사제목을 내놓기도 했다.
비엔나 출신이라는 프리미엄과 젊은 시절 잘 다져놓은 화려한 이력을 뒤로한 채 누구도 예상치못한 행보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마찬가지로 비엔나 출신으로 조성의 틀을 깨버린 쇤베르크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어간 형식과 문법에 치우친 현대음악에대한 반감이 작용했다. 그는 젊은 시절,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으며 언제나 음악의 본질을 강조했다.
독일 유력 주간지 '차이트(Zei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재즈를 연주하지 쇤베르크를 연주하지 않는다"며 "쇤베르크의 길을 걷고 싶지않기 때문에 조성 음악을 추구한다"고도 했다. 20세기말, 의식적으로 현대음악을 연주해야한다는 무브먼트에 맞서 청중과 호흡하는 음악을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이른 성공을 거뒀지만 보수적이며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빈 음악계에 대한 반발심 또한 그의 느닷없는 행보와 연관이 깊다.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받다보니 결점없는 연주에 대한 부담감이 을 터. 그는 마치 스포츠에서 기록을 매기는 것처럼 매번 연주때마다 틀리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힘들었다고 한다. " 클래식 무대에서는 만족감,평안,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덧붙임과 함께. 실제로 그의 바흐, 베토벤 음반들은 전통적인 조형미가 한껏 살아있는데 온전히 정통 클래식이란 틀 안에서 성장했기에 예술적 자유를 꿈꿔왔던 그는 무척이나 답답했을 것이다. 비엔나 아카데미 회원들이 수여한 베토벤 링을 반납했던 그의 치기어린 결기는 좋은 예이며 확고한 저항이었다.
1999년 본인의 가짜 부고소식을 언론사에 알리고 결국, 버젓이 살아있음을 기념하는 '부활 파티'를 여는가 하면 나체로 연주하는 극단적인 기행도 서슴치않았는데 이는 많은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비엔나 스타일의 음악과 재즈 블루스를 절묘하게 결합해낸 것을 비롯해 음악 장르간의 경계를 허문 성과나 가장 보수적인 비엔나 음악계 한복판에서 솔직담백한 입담과 행동으로 '예술적 자유'를 외쳤던 그의 용기는 박수 받을만 하다. 현재 그는 클래식을 비롯해서 다양한 자유롭게 오간 천재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예술세계는 참신함과 더불어 장르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융합된 예술이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현시대와 궤를 같이한다.
자기 자신을 '20세기 후반,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비엔나 출신 음악가'로 추켜 세우다보니 생전 호불호가 갈렸는데 개인주의적 성향과 소신 발언에 거침없는 이 시대의 젊은 세대에게는 어떤면에서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 아닐까. 그의 저서' Wort zur Musik'에서 그는 주장한다. "음악가의 과제는 관객에게 행복감을 주거나 최소한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괴짜,미치광이라는 수식어에 아랑곳하지않고 오롯이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철학을 견지했던 그가 이 시대에 인정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굴다 첼로 협주곡 op.129는 5악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1악장 '서곡(Overture)'을 들어보라. 빅밴드 스타일의 금관악기에 첼로의 경쾌한 리프와 록,펑크 스타일이 녹아있으며, 또한 이와 대조적으로 서정적인 오스트리아 민속 음악도 등장한다. 재즈나 펑크,록에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첼로가 돋보이면서도 다양한 음악장르가 녹아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며 듣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는 음악임에는 틀림없다.
유튜브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XgvUfJKEvPU&list=RDC1vtL63PWn8&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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