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그널]박병준의 클래스토리 <수용소의 바이올리니스트>
방석현 기자 | sj@beautynury.com 플러스아이콘
입력 2021-08-13 15:31 수정 2021-08-31 15:35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을 고르라면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알쓸범잡>에서, 끔찍한 전쟁 범죄 중에서도 최악의 것으로 제노사이드가 언급되기도 했지요. 가장 널리 알려진 제노사이드는 나치 독일이 약 600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홀로코스트(Holocaust)일 것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당시 여러 곳에 설치되었던 수용소였지요. 가장 대표적인 수용소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 세워진 절멸 수용소인데, 이곳에서만 100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상을 생각하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 오케스트라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총 5-6개의 오케스트라가 존재했는데, 대부분은 남성 수용소 안에서 만들어진 오케스트라였습니다. 1941년부터 생겼다고 합니다. 여성 수용자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는 악명높았던 간부 만들(M. Mandl, 1912-1948)에 의해 1943년 6월에 처음 만들어지지요. 당시 인원은 20명이었습니다. 남성 수용자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들이 대부분 직업 음악가들로 이루어졌던 데에 반해, 여성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중 음악 전공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악기 구성의 균형도 맞지 않았는데, 1943년 12월 수용소에 이송되어 첼로 주자로 참여하게 된 라스커(A. Lasker-Wallfisch, 1925- )에 따르면, 그녀가 처음 오케스트라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유일한 첼로 주자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불평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성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경우, 노동과 연습 및 연주를 병행해야 했던 남성 오케스트라 단원들과는 달리, 노동은 면제되었으며, 나무 바닥과 난로가 갖춰진 별도의 건물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스실에서 사망할 확률이 다른 수용자들보다 현저하게 적었지요.


이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진 후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출중한 실력을 갖춘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로제(A. Rosé, 1906-1944). 빈 출신인 그녀는 유명한 음악가 집안의 일원이었지요. 그녀의 아버지 아놀트 로제(A. Rosé, 1863-1946)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오랜 기간 재임한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어머니 유스티네 말러(J. Mahler, 1868-1938)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 Mahler, 1860-1911)의 여동생이었습니다. 큰아버지 에두아르트(E. Rosé, 1859-1943)는 뛰어난 첼리스트였고, 알마의 오빠 알프레드(A. Rosé, 1902-1975)는 지휘자, 작곡가인 동시에 피아니스트였지요.


사실, 알마는 어쩌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1938년에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빈 필에서 쫓겨난 아놀트, 그리고 알마는 1939년 런던으로 피신하는 데에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마는 같은 해 11월, 음악회를 위해 네덜란드로 향합니다. 이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지 석 달이 되었을 때였는데, 아마 알마는 당시 네덜란드가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심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당시 70대 중반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30대였던 알마가 그녀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고픈 마음이 컸으리라 예상할 수 있고요.



빈에서 런던으로 피신했을 당시의 로제 부녀. 알마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으로 보입니다.
(사진: Gustav Mahler–Alfred Rosé Collection, Music Library, Western University, London, Canada)



그러나,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어 갔고, 결국 알마는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피신하려다 체포되고 맙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여성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된 알마는 오케스트라를 엄격하게 훈련시키며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단원들 중 전공자도 별로 없었고, 악기 구성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서로의 언어도 다 달라 의사 소통에 어려움까지 있었지만, 알마의 노력으로 오케스트라는 점차 성장하게 됩니다. 인원도 늘었고요. 알마는 편곡 작업도 직접 담당하였으며, 레퍼토리도 점차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단원들이 노동에서 면제된 것도, 그들에게 악기 보호를 위해 나무 바닥에 난로가 딸린 공간이 마련된 것도 알마 덕분이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업무는 수용자들이 노동을 하러 갈 때, 그리고 노동을 마치고 올 때 행진곡 등을 연주하는 일이었으며, 일요일마다 나치 간부들을 위한 음악회에서 연주해야 했습니다. 알마와 라스커 같은 실력있는 연주자들은 독주 연주도 했고요. 또, 당일에 가스실로 향할 환자들 구역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는데, 이는 청중들과 연주자들 모두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상황에서 연주해야 했던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고된 노동을 하러 현장으로 향하던 수용자들은 어떤 기분으로 이들의 음악을 들었을까요? 또, 잔인한 나치 간부들이 음악을 즐겨 들으며 감동받는 모습을 보며, 연주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름다운 음악을 둘러싼 참혹한 현실은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계속 유지되어 쓰임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곧 생존을 의미했습니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지요. 알마의 노력으로 오케스트라 단원 수는 1944년에 5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알마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더라도 카피스트(Copyist)처럼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일을 할 사람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더 살리고자 노력했지요. 또, 아파서 결국 가스실로 갈 운명에 처했던 단원들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엄격한 알마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두고 아버지 아놀트가 들어도 되겠다는 말도 했던 것을 보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944년 4월 초, 알마는 갑자기 고열과 두통 및 복통 증세를 보이다 사망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 추정될 뿐,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다른 지휘자가 알마의 뒤를 이었지만, 오케스트라는 점차 쇠퇴해가고 결국 11월 해체되지요. 알마의 죽음과 함께 단원들은 자신들이 이제 가스실로 향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에는 많은 단원들이 전쟁이 끝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생존하였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완벽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연주 도중 나치 간부들이 잡담을 하는 등 태도가 좋지 않으면, 연주를 중단하고 “�이렇게 연주할 수는 없다”�고 일갈할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높은 자존심을 유지하였던 알마. 음악을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한 위대한 예술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억될 것입니다.


추천음반: 알마의 음반은 단 하나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매우 아쉽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를 감안하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음반은 1920년대 후반 아버지 아놀트와 함께 바흐(J. S. Bach, 1685-1750)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녹음한 음반입니다. 부녀의 바이올린 음색이 닮아있는 것이 흥미롭지요.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아름답지만 동시에 먹먹하게 다가오는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0WMPUcXsrqY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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