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고궁을 거닐어 본 적이 있으신지. 수백 년을 산 고목에 연초록 새싹이 움트고 노란 봄볕 사이로 꽃잎이 흩날리는 계절이면, 구중궁궐에도 오래 묵은 봄날이 또다시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문헌과 예인들에 의해 전해오는 전통 춤으로 우리는 옛 궁궐의 봄 풍경을 보다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궁중에서 추었던 춤, 궁중 무용을 다른 말로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才]를 드린다[呈]’는 뜻을 담고 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정재는 수십 가지인데, 그중 조선 순조 때 새로 만들어진 정재가 20여 종목이다. 정재 창작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은 순조의 아들이었던 왕세자 ‘효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정조를 빼닮아 성군이 될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던 효명은 총명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선 말 세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와 악으로 나라의 법도를 굳건히 하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가 만든 춤 가운데서도 ‘박접무’와 ‘춘앵전’은 봄날의 정취를 고스란히 무대에 옮긴 듯한 작품들이다.
범나비의 춤, 박접무撲蝶舞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공연 중 박접무] 나비를 흉내 낸 춤, 하면 동요 ‘나비야’에 맞춰 양팔을 팔랑거리는 율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궁중 춤 가운데에도 나비의 모습을 본떠 만든 춤이 있다. 순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박접무다. 궁중의 춤답게 느리고 우아한 춤사위로 나비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순조 대 무자년의 잔치에 대해 남긴 진작의궤를 비롯해 몇몇 정재무도홀기에 박접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정재무도홀기는 정재의 연행 순서에 따라 춤사위와 반주 음악, 노랫말 등을 적어둔 무보舞譜의 일종이다. 박접무(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자진작의궤)
의상의 화려한 문양도 눈길을 끈다. 비교적 단조로운 여느 궁중 춤의 복식과 달리, 그림 속 박접무 의상에는 사방으로 날고 있는 나비들이 ‘화접포’라 불리는 겉옷에 가득하다. 날개의 무늬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색색의 나비를 초록 비단에 수놓은 의상은 꽃과 나비로 가득한 궁궐의 정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춤으로 분류하지만, 반주 음악과 노래가 어우러진 정재는 종합 예술 형태를 띤다. 박접무는 ‘만정방滿庭芳’이란 이름의 기악곡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꽃이 가득한 뜰로 풀이되는 ‘만정방’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신위가 정민교의 시조를 한시로 번역한 후 붙인 제목과 같다. 또 춤 중간에 무용수들이 직접 노래도 부르는데, 무용수들이 부르는 노래 혹은 노랫말을 ‘창사唱詞’라 한다. 채접쌍쌍탐춘광(彩蝶雙雙探春光) / 화불금시박(花拂金翅撲) / 격주렴미인(隔珠簾美人) / 일반화작삭(一般花灼爍) - 박접무 창사 전문全文
봄볕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쌍쌍이 날아든 오색나비의 금빛 날갯짓으로 봄 풍광을 노래한 창사의 화자는 후반부에서 ‘주렴 너머 미인도 활짝 핀 꽃과 같은데…….’ 하고 여운을 남긴다. 미인의 오지 않은 봄 그리고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노래한 시조 ‘만정방’ 화자의 이미 가버린 봄이 묘하게 닮은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꾀꼬리의 노래, 춘앵전春鶯囀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공연 중 춘앵전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담은 춘앵전은 정재 중에서도 보기 드문 독무獨舞다. 바닥에는 꽃돗자리[花紋席]가 깔리고, 한번 돗자리 위에 오른 무용수는 춤이 끝날 때까지 돗자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좁은 돗자리 안에서 홀로 추지만, 춘앵전은 춤사위가 풍부한 춤으로도 손꼽힌다. 춘앵전에 관한 기록은 무자진작의궤를 비롯해 헌종, 고종 대의 각종 의궤와 무도홀기에 두루 전한다. 왕실 잔치를 기록한 의궤마다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도 인기 레퍼토리였던 모양이다. 의상은 꾀꼬리를 닮은 노란 빛깔 ‘앵삼鶯衫’을 입는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알록달록한 오색한삼을 손에 낀다. 남성 무용수의 경우 흰색 상의에 패랭이꽃[石竹花] 문양이 그려진 초록 쾌자를 입고 붉은색의 홍한삼을 손에 끼기도 한다. 춘앵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자진작의궤)
춤의 반주 음악은 영산회상의 한 갈래인 ‘평조회상’이다. 평조회상을 ‘유초신지곡’이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새잎을 피워 연둣빛 풋풋한 버드나무가 단박에 그려지는 이름이다. 꾀꼬리 한 마리 노닐기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경이 또 있을까 싶다. 평조회상 한바탕을 다 연주하려면 30분이 넘게 걸리는데 최근에 공연하는 춘앵전은 10분 이내로 짧게 구성하고 공연 중에 부르는 창사 또한 첫 구절 정도만 노래한다. 박접무의 창사와 더불어 춘앵전의 창사 또한 효명세자의 작품이다.
빙정월하보(娉婷月下步) / 나수무풍경(羅袖舞風輕) / 최애화전태(最愛花前態) / 군왕임다정(君王任多情) - 춘앵전 창사 전문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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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고궁을 거닐어 본 적이 있으신지. 수백 년을 산 고목에 연초록 새싹이 움트고 노란 봄볕 사이로 꽃잎이 흩날리는 계절이면, 구중궁궐에도 오래 묵은 봄날이 또다시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문헌과 예인들에 의해 전해오는 전통 춤으로 우리는 옛 궁궐의 봄 풍경을 보다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궁중에서 추었던 춤, 궁중 무용을 다른 말로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才]를 드린다[呈]’는 뜻을 담고 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정재는 수십 가지인데, 그중 조선 순조 때 새로 만들어진 정재가 20여 종목이다. 정재 창작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은 순조의 아들이었던 왕세자 ‘효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정조를 빼닮아 성군이 될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던 효명은 총명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선 말 세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와 악으로 나라의 법도를 굳건히 하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가 만든 춤 가운데서도 ‘박접무’와 ‘춘앵전’은 봄날의 정취를 고스란히 무대에 옮긴 듯한 작품들이다.
범나비의 춤, 박접무撲蝶舞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공연 중 박접무]
나비를 흉내 낸 춤, 하면 동요 ‘나비야’에 맞춰 양팔을 팔랑거리는 율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궁중 춤 가운데에도 나비의 모습을 본떠 만든 춤이 있다. 순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박접무다. 궁중의 춤답게 느리고 우아한 춤사위로 나비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순조 대 무자년의 잔치에 대해 남긴 진작의궤를 비롯해 몇몇 정재무도홀기에 박접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정재무도홀기는 정재의 연행 순서에 따라 춤사위와 반주 음악, 노랫말 등을 적어둔 무보舞譜의 일종이다.
박접무(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자진작의궤)
무자진작의궤에는 잔치에서 추었던 춤을 그림으로도 남겨두었는데, 박접무 그림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점이 많다. 먼저 춤의 대오가 독특하다. 대부분의 궁중 춤에서 무용수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거나, 나란히 일렬로 서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섯 명의 무용수가 위아래로 긴 열 십(十) 자 형태로 서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서로 등지고 있다. 춤의 기록을 재현한 오늘날의 박접무에서 무용수들은 각각 여섯 마리의 나비가 되기도 하고, 둘씩 짝을 지어 세 쌍의 무용수가 함께 나비의 움직임을 표현하기도 한다.
의상의 화려한 문양도 눈길을 끈다. 비교적 단조로운 여느 궁중 춤의 복식과 달리, 그림 속 박접무 의상에는 사방으로 날고 있는 나비들이 ‘화접포’라 불리는 겉옷에 가득하다. 날개의 무늬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색색의 나비를 초록 비단에 수놓은 의상은 꽃과 나비로 가득한 궁궐의 정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춤으로 분류하지만, 반주 음악과 노래가 어우러진 정재는 종합 예술 형태를 띤다. 박접무는 ‘만정방滿庭芳’이란 이름의 기악곡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꽃이 가득한 뜰로 풀이되는 ‘만정방’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신위가 정민교의 시조를 한시로 번역한 후 붙인 제목과 같다.
또 춤 중간에 무용수들이 직접 노래도 부르는데, 무용수들이 부르는 노래 혹은 노랫말을 ‘창사唱詞’라 한다.
채접쌍쌍탐춘광(彩蝶雙雙探春光) / 화불금시박(花拂金翅撲) / 격주렴미인(隔珠簾美人) / 일반화작삭(一般花灼爍)
- 박접무 창사 전문全文
봄볕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쌍쌍이 날아든 오색나비의 금빛 날갯짓으로 봄 풍광을 노래한 창사의 화자는 후반부에서 ‘주렴 너머 미인도 활짝 핀 꽃과 같은데…….’ 하고 여운을 남긴다. 미인의 오지 않은 봄 그리고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노래한 시조 ‘만정방’ 화자의 이미 가버린 봄이 묘하게 닮은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꾀꼬리의 노래, 춘앵전春鶯囀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공연 중 춘앵전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담은 춘앵전은 정재 중에서도 보기 드문 독무獨舞다. 바닥에는 꽃돗자리[花紋席]가 깔리고, 한번 돗자리 위에 오른 무용수는 춤이 끝날 때까지 돗자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좁은 돗자리 안에서 홀로 추지만, 춘앵전은 춤사위가 풍부한 춤으로도 손꼽힌다.
춘앵전에 관한 기록은 무자진작의궤를 비롯해 헌종, 고종 대의 각종 의궤와 무도홀기에 두루 전한다. 왕실 잔치를 기록한 의궤마다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도 인기 레퍼토리였던 모양이다. 의상은 꾀꼬리를 닮은 노란 빛깔 ‘앵삼鶯衫’을 입는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알록달록한 오색한삼을 손에 낀다. 남성 무용수의 경우 흰색 상의에 패랭이꽃[石竹花] 문양이 그려진 초록 쾌자를 입고 붉은색의 홍한삼을 손에 끼기도 한다.
춘앵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자진작의궤)
춤의 반주 음악은 영산회상의 한 갈래인 ‘평조회상’이다. 평조회상을 ‘유초신지곡’이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새잎을 피워 연둣빛 풋풋한 버드나무가 단박에 그려지는 이름이다. 꾀꼬리 한 마리 노닐기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경이 또 있을까 싶다. 평조회상 한바탕을 다 연주하려면 30분이 넘게 걸리는데 최근에 공연하는 춘앵전은 10분 이내로 짧게 구성하고 공연 중에 부르는 창사 또한 첫 구절 정도만 노래한다. 박접무의 창사와 더불어 춘앵전의 창사 또한 효명세자의 작품이다.
빙정월하보(娉婷月下步) / 나수무풍경(羅袖舞風輕) / 최애화전태(最愛花前態) / 군왕임다정(君王任多情)
- 춘앵전 창사 전문
춘앵전은 창사뿐 아니라 춤사위의 이름도 시어詩語처럼 아름답다. 난새가 날아돌듯[回鸞], 탑을 오르듯[塔塔高], 흩날리는 꽃잎을 잡듯[轉花持], 꽃잎이 흐르는 물에 떨어지듯[落花流水], 금빛 모래가 날리듯[飛金沙], 제비가 집으로 돌아가듯[燕歸巢] ……. 반짝이는 비유로 봄 풍경이 눈에 선하다. 글로 읽는 춘앵전 역시 무르익은 봄을 만끽하기에 부족함 없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