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 공연예술까지 본격적인 ‘언택트’시대가 열린 지금. 단시간에 이뤄진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잘 녹아든 것은 기업들의 발빠른 대처가 톡톡히 한몫을 했다. 기업의 괄목할만한 성과는 예술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례와 그 성공에 있다. 예술은 우리 삶의 균형을 맞추고 윤택한 삶을 만들어가는 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힘을 발한다. 백조의 우아한 유영이 물속에서 격한 발길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예술은 스스로 존립해 갈 수 있는가?
K-pop과 같은 상업 예술은 재생산이 가능한 수익구조로 인해 존립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시장에서 예술종사자들이 실제로 ‘생존’하는 시간과 교체시기가 몹시 짧아 예술 본질의 보존성, 순수성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예술의 전통적인 흐름을 따르는 오케스트라, 오페라 등은 자립이 가능한가? 순수예술은 사정이 더욱 열악해 예술종사자의 생존은 물론, 사회의 지속적인 지원 없이 “짧은 생존” 조차도 담보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보멀&보웬은 ‘예술의 경제적 딜레마’를 언급했다. 순수예술에 들어가는 비용만큼 수익이 창출되지 못해 종사자들이 경제적 빈곤에 빠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 할 때 시대를 불문하고 단원의 수는 70명으로 동일하다. 공연 횟수는 정해져 있는데 반해 단원 월급 등의 고정 지출은 점점 더 증가해 왔다. 소비자들은 여전히 실시간으로 생산되는 공연의 현전성을 요구하지만 공연 생산 비용은 점점 비효율적으로 증가하고 이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이 악순환의 꼬리는 계속돼 결국 공연 수익 자체가 줄어든다. 이는 예술의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의미하고 사회의 관심과 후원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기업들의 예술후원은 예술의 존립에 상당부분을 기여할 수 밖에 없고 예술 역시 기업의 후원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기업의 예술후원이 단순히 순수예술의 존립을 위한 도구는 아니다. 기업이 소비자를 통해 정당한 이익을 창출할수록 사회에 다시 환원하는 것은 기업의 윤리적 의무이며 이를 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끌어 갈 때 기업의 가치 역시 상승 효과를 겪는다. 이는 현재 많은 기업들이 자각하고 있는 이슈이며 적극적으로 예술 후원에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UBS는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Art- Eco System"을 통해 문화예술을 후원하고 있다. 몽트뢰 재즈 축제,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 베이징 뮤직 축제 등을 후원하고 있다. 특히 현대미술 분야를 집중 후원하고 있는데,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구겐하임과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접근성과 이해를 높이고 있다.
UBS처럼 단체를 후원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Rolex의 경우는 다른 측면에서 예술지원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의 광고를 보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동안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통해 기업의 가치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정교한 피아노 연주처럼 롤렉스도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카피는 그들이 예술후원에 접근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다.
기업의 예술지원 당위성은 예술의 존립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개개인의 미시적 관점에서도 살펴봐야 할 문제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 이어지는 예술을 통해 얻는 정서적 안정감은 사회의 많은 이슈를 해결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술계 종사자가 아닌 개인의 삶을 통해 예술의 당위성을 조명해 보면 역시나 내 아이들에게 시선이 돌아가게 된다. 대형학원에서 한국의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첫째의 하루 일과는 작년과 천지차이로 변했다. 아이의 절대공부(숙제)량이 늘었고 자연스럽게 책과 음악, 놀이에서 멀어졌다. 노래를 부르듯 시를 암송하고, 동생들과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게 춤출 때 보였던 눈빛의 반짝거림은 학원 숙제에 하루를 오롯이 투자하면서 눈에 뜨게 줄었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던 예술이 일순간 시간낭비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아이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엄마로서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라면 음악, 미술, 문학이 함께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여유로운 삶을 어른이 된 첫째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회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물리적 가치만이 자리잡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예술이 가진 힘은 금방 드러나지 않는다. 장개석이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날 당시 문화재들을 대만으로 가져와 ‘국립고궁박물원’을 만든 것은 대만이 중국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수호정신과 더불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하나로서 기능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많은 문화재를 소실하고 고증을 해내지 못한 대가로 ‘문화의 몸살’을 앓고 있지 않은가.
문화는 사회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울타리이자 기업이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자원의 보고이다. 문화예술의 가치가 평가절하 된 기업들은 대중의 시선을 외면받기 쉽다. 정체성, 창의성, 개성 없는 기업의 제품에 매력을 느끼기에 소비자들은 너무 똑똑하다. 예술은 기업 이미지 상승 효과와 더불어 생산제품에 대한 매력도를 상승시키는 효과까지 있다. 코로나로 일상이 무너지기 쉬운 때일수록 기업이 예술후원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하는 이유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너지기 쉬운 현대사회의 정신에 손 내밀어 주는 마지막 구원은 예술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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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 공연예술까지 본격적인 ‘언택트’시대가 열린 지금. 단시간에 이뤄진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잘 녹아든 것은 기업들의 발빠른 대처가 톡톡히 한몫을 했다. 기업의 괄목할만한 성과는 예술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례와 그 성공에 있다. 예술은 우리 삶의 균형을 맞추고 윤택한 삶을 만들어가는 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힘을 발한다. 백조의 우아한 유영이 물속에서 격한 발길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예술은 스스로 존립해 갈 수 있는가?
K-pop과 같은 상업 예술은 재생산이 가능한 수익구조로 인해 존립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시장에서 예술종사자들이 실제로 ‘생존’하는 시간과 교체시기가 몹시 짧아 예술 본질의 보존성, 순수성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예술의 전통적인 흐름을 따르는 오케스트라, 오페라 등은 자립이 가능한가? 순수예술은 사정이 더욱 열악해 예술종사자의 생존은 물론, 사회의 지속적인 지원 없이 “짧은 생존” 조차도 담보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보멀&보웬은 ‘예술의 경제적 딜레마’를 언급했다. 순수예술에 들어가는 비용만큼 수익이 창출되지 못해 종사자들이 경제적 빈곤에 빠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 할 때 시대를 불문하고 단원의 수는 70명으로 동일하다. 공연 횟수는 정해져 있는데 반해 단원 월급 등의 고정 지출은 점점 더 증가해 왔다. 소비자들은 여전히 실시간으로 생산되는 공연의 현전성을 요구하지만 공연 생산 비용은 점점 비효율적으로 증가하고 이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이 악순환의 꼬리는 계속돼 결국 공연 수익 자체가 줄어든다. 이는 예술의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의미하고 사회의 관심과 후원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기업들의 예술후원은 예술의 존립에 상당부분을 기여할 수 밖에 없고 예술 역시 기업의 후원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기업의 예술후원이 단순히 순수예술의 존립을 위한 도구는 아니다. 기업이 소비자를 통해 정당한 이익을 창출할수록 사회에 다시 환원하는 것은 기업의 윤리적 의무이며 이를 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끌어 갈 때 기업의 가치 역시 상승 효과를 겪는다. 이는 현재 많은 기업들이 자각하고 있는 이슈이며 적극적으로 예술 후원에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UBS는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Art- Eco System"을 통해 문화예술을 후원하고 있다. 몽트뢰 재즈 축제,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 베이징 뮤직 축제 등을 후원하고 있다. 특히 현대미술 분야를 집중 후원하고 있는데,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구겐하임과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접근성과 이해를 높이고 있다.
UBS처럼 단체를 후원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Rolex의 경우는 다른 측면에서 예술지원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의 광고를 보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동안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통해 기업의 가치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정교한 피아노 연주처럼 롤렉스도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카피는 그들이 예술후원에 접근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다.
기업의 예술지원 당위성은 예술의 존립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개개인의 미시적 관점에서도 살펴봐야 할 문제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 이어지는 예술을 통해 얻는 정서적 안정감은 사회의 많은 이슈를 해결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술계 종사자가 아닌 개인의 삶을 통해 예술의 당위성을 조명해 보면 역시나 내 아이들에게 시선이 돌아가게 된다. 대형학원에서 한국의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첫째의 하루 일과는 작년과 천지차이로 변했다. 아이의 절대공부(숙제)량이 늘었고 자연스럽게 책과 음악, 놀이에서 멀어졌다. 노래를 부르듯 시를 암송하고, 동생들과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게 춤출 때 보였던 눈빛의 반짝거림은 학원 숙제에 하루를 오롯이 투자하면서 눈에 뜨게 줄었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던 예술이 일순간 시간낭비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아이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엄마로서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라면 음악, 미술, 문학이 함께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여유로운 삶을 어른이 된 첫째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회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물리적 가치만이 자리잡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예술이 가진 힘은 금방 드러나지 않는다. 장개석이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날 당시 문화재들을 대만으로 가져와 ‘국립고궁박물원’을 만든 것은 대만이 중국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수호정신과 더불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하나로서 기능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많은 문화재를 소실하고 고증을 해내지 못한 대가로 ‘문화의 몸살’을 앓고 있지 않은가.
문화는 사회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울타리이자 기업이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자원의 보고이다. 문화예술의 가치가 평가절하 된 기업들은 대중의 시선을 외면받기 쉽다. 정체성, 창의성, 개성 없는 기업의 제품에 매력을 느끼기에 소비자들은 너무 똑똑하다. 예술은 기업 이미지 상승 효과와 더불어 생산제품에 대한 매력도를 상승시키는 효과까지 있다. 코로나로 일상이 무너지기 쉬운 때일수록 기업이 예술후원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하는 이유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너지기 쉬운 현대사회의 정신에 손 내밀어 주는 마지막 구원은 예술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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