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그널] 원종원의 커튼 콜 한국 뮤지컬 시장의 신화가 되다, '지킬 앤 하이드'
원종원 기자 | media@beautynury.com 플러스아이콘
입력 2024-12-23 06:00 수정 2024-12-23 06:00

킬러 콘텐츠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죽여주는’ 콘텐츠라는 의미로, 일종의 게임 체인저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을 말한다. K-무비의 ‘쉬리’나 ‘기생충’, K-드라마의 ‘오징어 게임’이 그런 존재다. 시장은 물론 업계의 판도마저 모두 바꿔버릴 정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한민국의 뮤지컬계에도 킬러 콘텐츠가 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 공연가에 규모의 경제라는 가능성을 증명해 준 ‘오페라의 유령’, 중년 관객을 대거 공연장으로 불러 모았던 ‘맘마 미아!’, 민족이여 일어나라를 부르짖는 엔딩 씬이 국민적 울분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줬던 ‘명성황후’ 등이 대표적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남다른, 이름값 제대로 하는 우리 뮤지컬 공연가의 흥행작들이다. 
 

그러나 뮤지컬이 대중문화적 성격을 띠는 상업적 공연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히 우리 공연가에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이뤄놓은 성과는 간과할 수 없다. 그만큼 상징적이고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대규모 국제 회의장이었던 코엑스 오디토리움을 개조한 공간에서 처음 막을 올린 이래 우리나라 공연시장, 특히 뮤지컬 산업의 외연을 확장시키는데 큰 족적을 남긴 신화가 됐다. 객석 의자 팔걸이 한쪽으로 테이블이 펼쳐지는, 공연장이기보다 강연장같은 공간에 음향시설도 그리 좋지못한 환경이었지만,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조승우’의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삽시간에 동나버리는 인터넷 예매표 판매나 서버마저 다운되는 풍경은 한참 세월 지난 요즘도 회자되는 이 뮤지컬의 진풍경이 됐다. 대학 입시나 일반 오디션 현장을 찾아가면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자유곡이 ‘지금 이 순간’ 혹은 ‘한때는 꿈에’인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얼마나 우리 대중과 배우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인가를 여실히 미루어 짐작케 한다. 
 

원작은 스코틀랜드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이다. 원래 제목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관한 이상한 사건 보고서’다. 런던에서 일하는 변호사인 가브리엘 존 어터슨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지킬 박사와 지옥에서 온 듯 잔인했던 사내 하이드씨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을 2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기술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1886년 발표됐던 원작 소설은 단지 추리물로서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나 내면, 정신분열증, 특히 한 사람의 내면에 여러 다양한 인격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내용을 담아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미권에서는 아예 ‘지킬과 하이드’라는 표현 자체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기 내면의 또다른 자아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으로 쓰일 정도다. 일설에 의하면 스티븐슨 스스로가 환각제를 먹고 이 소설을 썼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소설 집필 당시 그는 인근의 병원으로부터 ‘맥각’이라 불리던 버섯류의 환각제 치료를 받았던 기록이 있기 때문인데, 사실 여부야 어쨌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인격분리의 생생한 체험은 아마도 그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튼 소설 자체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출판 첫 해에 4만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10여년 세월 동안 25만부가 팔려 스티븐슨이 집필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됐다. 소설의 인기는 수많은 파생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그마치 120여종이 넘는 영화의 등장으로도 이어졌다. 물론 이는 여러 패러디나 괴물(?) 캐릭터로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에서의 활용 등은 제외한 수치로, 만일 이마저도 포함시킨다면 파악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소설을 뮤지컬을 만든 사람은 프랭크 와일드혼과 영국 태생의 극작가 레슬리 브리쿠스다. 처음 아이디어를 구상했던 80년대 후반에는 작곡가 와일드혼이 작가였던 스티브 쿠덴과 초안을 마련하며 제작을 시도했으나 투자자를 찾지 못해 결국 좌절했고, 훗날 브리쿠스가 새롭게 크리에이티브 팀으로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뮤지컬화가 궤도에 오르게 됐다. 


‘지킬 앤 하이드’의 흥행이 유독 우리 시장에서 더욱 폭발적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브로드웨이에서 선보였던 오리지널 캐스트의 공연은 맨해턴 45번가의 플리머스 극장에서 1997년 시작돼 5년 여간 1500여회의 공연을 이어갔다. 비교적 장기에 걸친 공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킬 앤 하이드’는 브로드웨이 공연판의 전형적인 흥행작으론 손꼽히지 못한다. 종연 후 남게 된 대규모의 손실이 큰 탓인데, 초기 투자비였던 7백만 달러의 약 75% 가량만을 회수하는 ‘망작’ 수준에 머물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기 위해 스키드 로우의 리드 싱어였던 세바스찬 바흐나 늘씬한 미녀들이 해변을 거니는 ‘베이 워치’ 그리고 인간과 대화하는 자동차가 등장했던 ‘전격Z작전(원제는 나이트 라이더였다)’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인기 TV 탤런트 데이비드 하셀호프 등 스타 캐스팅을 활용하는 무대를 꾸몄지만, 역시 흥행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던 셈이다.


투자비를 건지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뮤지컬로서의 인기마저 외면당했다 뜻은 아니다. 사실 ‘지킬 앤 하이드’의 명성은 흥행 뮤지컬로서가 아니라 음악적 매력에서 기인됐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제작되어진 음반의 종류도 다양하다. 처음 화제가 된 것은 본격적인 무대 개막에 앞서 음악을 선보이기 위한 콘셉 앨범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이 올려지기 훨씬 이전인 1990년에 공개됐는데, 흥미로운 것은 아직 본격적인 공연이 올려지기 이전이라 지킬박사를 맡은 배역이 하이드씨를 연기하듯, 뮤지컬 배우 린다 에더가 지킬의 약혼녀인 리사(훗날 엠마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와 사창가 밤무대 여인인 루씨 역을 모두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음반은 훗날 뮤지컬 애호가들로부터도 희귀음반이라 불리는 인기를 모았고, 음악이 좋은 뮤지컬이라는 명성도 얻게 했다. 나라나 도시마다 성공적인 공연이 등장하며 여러 언어로 번안된 라이선스 공연 음반들도 등장했다. 1997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는 프랑스 음반이 발표됐고, 1999년 독일 베르멘에서는 독일어 버전이 처음 공개됐다. 이어 스페인 마드리드 캐스트, 헝가리 부다페스트 캐스트, 오스트리아 비엔나 캐스트, 일본 토쿄 캐스트, 체코 프라하 캐스트, 스웨덴 스톡홀름 캐스트 음반이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진기록을 이어갔다. 우리말 버전의 음반은 2004년과 2008년에 각각 만들어졌는데, 앞의 경우가 하이라이트 음반의 성격이 강했다면 훗날 제작된 앨범은 전곡 수록 및 전 캐스트의 참여 앨범이어서 특별한 의미가 담긴 사례로 남게 됐다. 


매번 앙코르 무대가 꾸며질 때마다 완성도를 더한 무대와 극 전개의 간결함, 조화롭고 역동적인 앙상블의 호흡은 2024 앙코르 공연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들의 세대교체도 눈에 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로 나오는 홍광호의 인기는 극장 천장이라도 뚫을 기세지만, 함께 출연하는 전동석과 김성철의 무대 역시 도전적이고 매력적인 무대를 잘 선보이고 있다. 관록의 여배우 윤공주는 선민, 김환희와 무대를 꾸미고 있고, 최수진과 손지수의 엠마도 안정적이다. 정상급 역량의 주연들과 흥미로운 세대교체가 작품의 생명력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지킬 앤 하이드’는 특히 남자 주인공이 멋있는 작품이다. 1인 2역의 매력 탓이다. 커튼콜이 가장 인상적이란 세평도 있다. 최고의 장면은 ‘지금 이 순간’이 불리는 실험실의 모습이다. 지킬 박사가 처음으로 하이드씨로 변하는 숨 막히는 격정을 선보인다. 2막 후반부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동시에 연기하는 ‘대면’도 수많은 패러디가 만들어진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얼굴의 반쪽이 지킬이고, 다른 쪽이 하이드인 극중 묘사는 배우에게는 난이도가 높아 괴롭지만 관객에게는 상상을 자극하는 매력을 만들어낸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의 이중성과 흡사하다고 할까. 할 말 많고, 사랑도 많이 받는 흥미로운 뮤지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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