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정답이라 생각하는 일에 반기를 들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결국 용기 있는 자들의 외침이 문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마치 성경처럼 여겨졌던 이론에 맞서 정반대를 주장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연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펴고 힘껏 날아올라 별과 우주가 품은 진실을 향해 다가가려 할 때, 저 멀리 반짝이던 희망이 곧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별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뮤지컬 ‘시데레우스’가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과학적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어려움에 맞서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실존 인물인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와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창작된 뮤지컬로 작품명은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에서 따왔다. 2019년 초연 당시 관객들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이끌면서 존재감을 분명히 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나 스토리뿐만 아니라 독보적인 무대 연출 덕분에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비스듬히 놓인 반구형의 무대가 스크린 영상과 어우러진 장면들이 마치 우주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환상적이다. 2022년 공연은 일찍이 레플리카 버전 라이선스 계약을 마친 일본과 중국 공연도 함께 이뤄져 더욱 뜻깊다.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을 향한 해외 시장의 관심이 날로 커지면서 우수한 콘텐츠가 해외로 수출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는데, 뮤지컬 ‘시데레우스’ 역시 그중 하나다. 그만큼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장르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교육적 가치와 예술적 감각을 두루 갖춘 수작 중의 수작이라 평가받기 충분하다. 작품은 상상과 현실을 적절히 배합해 흥미로운 결과물로 완성됐다. 갈릴레오의 딸인 수녀 마리아는 어느 날 종교재판을 받으러 떠난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방에 숨겨진 편지들을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편지를 보낸 발신인이 모두 케플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사연에 의문을 품게 된다.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언젠가부터 방문을 걸어 잠근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성장해 종교에 귀의하게 된 딸은 어느새 지구 밖 다른 행성과의 사이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이야기는 그런 마리아의 시선을 따라 과거로 향한다. ‘세상의 중심은 지구’라는 견해가 믿음으로 굳어졌던 1598년, 케플러로부터 그의 저서 ‘우주의 신비’ 선물과 함께 공동 연구를 제안받은 갈릴레오는 단번에 거절 의사를 전한다. 하지만 케플러는 포기하지 않고 갈릴레오를 설득하려 한다. 그는 “우주는 커다란 거미줄과 같다”고 말하면서 알고 싶은 정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내보인다. 케플러의 가설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려던 갈릴레오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근거 없는 상상처럼 보였던 가설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만나자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해버렸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케플러의 의견은 신앙과도 같았던 천동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야기였다. 단 한 번뿐이던 강렬한 만남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의 공동 연구는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갈릴레오가 고배율 망원경을 제작해 천체의 움직임을 직접 관측하게 되면서 기존 역사를 뒤집을만한 대사건이 벌어진다. 물론 뮤지컬 속 이야기는 실제와 꽤 다르다. 두 사람의 연구가 오늘날 과학사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실로 엄청나다. 다만 연구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었다. 케플러는 ‘우주의 신비’가 출간됐을 당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날 친구를 통해 갈릴레오에게 책을 전달했다고 한다. 갈릴레오도 자신의 견해와 일부 유사한 입장을 가진 케플러에게 반가운 마음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공동 연구는 이뤄지지 못했다. 두 사람의 성향이나 견해차로 인한 결과였다고는 하나 만약 뮤지컬에서처럼 두 과학자의 협업이 정말 이뤄졌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마리아와 갈릴레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극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극 중에서는 갈등 요소가 두드러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과 눈으로 확인한 진실 사이의 거리는 멀고 멀었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해야 내일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리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현실 너머 어딘가에 놓인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이자 힘이 된다.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일상이라는 항해를 인도할 별빛처럼 반짝일 때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본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주관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유독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모두가 정답이라 생각하는 일에 반기를 들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결국 용기 있는 자들의 외침이 문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마치 성경처럼 여겨졌던 이론에 맞서 정반대를 주장하는 일은 죽음을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연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펴고 힘껏 날아올라 별과 우주가 품은 진실을 향해 다가가려 할 때, 저 멀리 반짝이던 희망이 곧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별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뮤지컬 ‘시데레우스’가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과학적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어려움에 맞서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실존 인물인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와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창작된 뮤지컬로 작품명은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에서 따왔다.
2019년 초연 당시 관객들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이끌면서 존재감을 분명히 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나 스토리뿐만 아니라 독보적인 무대 연출 덕분에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비스듬히 놓인 반구형의 무대가 스크린 영상과 어우러진 장면들이 마치 우주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환상적이다.
2022년 공연은 일찍이 레플리카 버전 라이선스 계약을 마친 일본과 중국 공연도 함께 이뤄져 더욱 뜻깊다.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을 향한 해외 시장의 관심이 날로 커지면서 우수한 콘텐츠가 해외로 수출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는데, 뮤지컬 ‘시데레우스’ 역시 그중 하나다. 그만큼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장르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교육적 가치와 예술적 감각을 두루 갖춘 수작 중의 수작이라 평가받기 충분하다.
작품은 상상과 현실을 적절히 배합해 흥미로운 결과물로 완성됐다. 갈릴레오의 딸인 수녀 마리아는 어느 날 종교재판을 받으러 떠난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방에 숨겨진 편지들을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편지를 보낸 발신인이 모두 케플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사연에 의문을 품게 된다.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언젠가부터 방문을 걸어 잠근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성장해 종교에 귀의하게 된 딸은 어느새 지구 밖 다른 행성과의 사이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이야기는 그런 마리아의 시선을 따라 과거로 향한다.
‘세상의 중심은 지구’라는 견해가 믿음으로 굳어졌던 1598년, 케플러로부터 그의 저서 ‘우주의 신비’ 선물과 함께 공동 연구를 제안받은 갈릴레오는 단번에 거절 의사를 전한다. 하지만 케플러는 포기하지 않고 갈릴레오를 설득하려 한다. 그는 “우주는 커다란 거미줄과 같다”고 말하면서 알고 싶은 정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내보인다. 케플러의 가설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려던 갈릴레오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근거 없는 상상처럼 보였던 가설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만나자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해버렸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케플러의 의견은 신앙과도 같았던 천동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야기였다. 단 한 번뿐이던 강렬한 만남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의 공동 연구는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갈릴레오가 고배율 망원경을 제작해 천체의 움직임을 직접 관측하게 되면서 기존 역사를 뒤집을만한 대사건이 벌어진다.
물론 뮤지컬 속 이야기는 실제와 꽤 다르다. 두 사람의 연구가 오늘날 과학사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실로 엄청나다. 다만 연구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었다. 케플러는 ‘우주의 신비’가 출간됐을 당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날 친구를 통해 갈릴레오에게 책을 전달했다고 한다. 갈릴레오도 자신의 견해와 일부 유사한 입장을 가진 케플러에게 반가운 마음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공동 연구는 이뤄지지 못했다. 두 사람의 성향이나 견해차로 인한 결과였다고는 하나 만약 뮤지컬에서처럼 두 과학자의 협업이 정말 이뤄졌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마리아와 갈릴레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극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극 중에서는 갈등 요소가 두드러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과 눈으로 확인한 진실 사이의 거리는 멀고 멀었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해야 내일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리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현실 너머 어딘가에 놓인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이자 힘이 된다.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일상이라는 항해를 인도할 별빛처럼 반짝일 때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본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주관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유독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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